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문단 편집) == 여담 ==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존경한 인물 중의 하나다. 그는 괴테에 대해 역사상 가장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 중 한 명이라고 평했다.[[https://www.weforum.org/agenda/2019/02/5-favorite-books-of-albert-einstein?fbclid=IwAR1oKi2oNXHCCrVoEHtoMc4Bx69FFi0VFj2p9Ooe0kZicjBfTfBi6AXwVG0|출처]] * 한때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도 [[루트비히 판 베토벤/베토벤이 남긴 화제|매우 친하게 지냈었다]]. 본래 베토벤이 괴테의 저작을 즐겨 읽었었고 그의 희곡 [[에그몬트]]를 위한 서곡까지 작곡할 정도였다. 괴테는 베토벤을 만나자마자 그의 천재성에 감탄해 같은 날 저녁, 아내에게 베토벤에 대한 격찬을 늘어놓았고 베토벤은 기회가 될 때마다 괴테에게 피아노를 연주해 주었다. 하지만 각자 성격이 너무 정반대였기 때문인지 결말이 좋지 않았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으며 산책하던 중에 맞은편에서 오스트리아의 황후 및 귀족 몇 명이 걸어오자 자유분방하고 반항적인 기질의 베토벤은 저들에게 길을 비켜주지 말고 이대로 뚫고 가자고 했으나[* 전해지는 바로 베토벤은 괴테의 팔을 잡으며 저들이 우리에게 길을 양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괴테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그들에게 길을 비켜주며 모자까지 벗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베토벤은 먼저 걸아가며 자기 모자에 가볍게 손을 대곤 일행을 지나쳤다. 베토벤은 괴테를 기다리다가 그가 다가오자 [[천재|"내가 당신을 기다린 것은 당신이 그에 걸맞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라며 괴테가 황후 일행에 정중한 것을 나무랐지만 괴테는 스스로가 바이마르의 재상임을 상기시키며 예의를 차렸을 뿐이라 답했다. 그러자 베토벤은 [[귀족|저런 사람들]]이 하는 일은 훈장을 주는 것뿐이며 후세에 이름을 남길 위인도 아닌데 괴테가 너무 예의를 차린다고 큰 실망을 표했다. 베토벤 입장에서 괴테의 태도는 비굴한 속물처럼 느껴졌고 괴테의 입장에서 베토벤은 너무나 이기적이고 예의가 없는 사람이었다. 이 사건 이후로 두 사람은 만나지 않았다.[* 이 일화는 베토벤 연구가 알렉산더 윌록 세이어, 로맹롤랑, 펠릭스 후프 등에 의해 진위가 조사되었고 두 사람이 지인에게 해당 일화를 언급한 편지까지 실존해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 두 사람을 연결한 인물이 바로 [[베티나 폰 아르님]]으로, 괴테의 열렬한 팬이었던 베티나는 마찬가지로 괴테를 좋아했던 베토벤에게 만남을 권했다. 괴테도 베티나의 편지를 통해 베토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만남은 온천 휴양지에서 이뤄진 우연이었다. 괴테와 베토벤은 서로의 재능과 천재성에 감탄하며 이끌렸지만 둘의 성향과 인간성은 함께 하기엔 너무도 맞지 않았었던 것이다. * 아버지의 영향인지 괴테 본인도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모습이 있었다. 그의 자식들 중 유일하게 성인으로 성장한 아들 아우구스트는 결혼을 해서 이미 독립을 한 상태였음에도 매일 아침 아버지 괴테에게 문안 인사를 해야 했고, 만찬이 있는 날이면 아버지를 대신해 여러 사람들 앞에서 축시를 낭독해야 했다고 한다. 괴테는 일생 내내 귀족적인 풍습을 몸에 갖고 살았고 당대 유럽의 왕족들과도 어울린 경험이 있어 이러한 문화를 당연하게 받아들였지만, 아우구스트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괴테의 생활 방식에서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당대 최고의 예술가이자 이름 높았던 유명인의 아들이어 이목을 끌었다는 점 또한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주었을 것이다.] 방대한 예술적, 학문적 지식에다가 평민과 귀족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와 잘 어울리는 아버지와는 다르게 그의 아들은 내성적인 성격이라 주위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결국 괴테의 아들은 알코올 중독을 앓다가 40살에 세상을 떠났다. * 괴테는 음악에 관심이 많아서[* 괴테는 자신이 문학가임에도 음악을 모든 예술 중의 최고로 평했다(!).] 음악가 첼터[* 카를 프리드리히 첼터, Karl Friedrich Zelter (1758 - 1832). [[펠릭스 멘델스존]]의 스승.]와 교류하며 오페라제작에 힘쓰기도 했으며 멘델스존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음악을 부활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괴테를 존경하여 그의 시 [[마왕(동음이의어)|마왕]]을 [[마왕(음악)|가곡]]으로 작곡한 [[프란츠 슈베르트]]가 악보와 편지를 보내오자 괴테는 음악은 시와 글보다는 못하다면서 냉정하게 외면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슈베르트 사후[* 그가 죽고 2년 뒤인 1830년에 그랬다고 한다. 여기에는 다양한 추측들이 있는데 많은 존경과 찬사를 받으며 수많은 편지를 받았던 괴테였는데 그 수많은 편지중에 하나였던 무명의 [[프란츠 슈베르트]] 편지를 그냥 넘겼을거라는 추측이 있다.]에 그를 인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에 대해선 높이 평가하였으며 바이마르의 궁정 예술감독 시절엔 모차르트의 작품을 자주 공연하였다. 그 외에도 파우스트를 오페라로 만들 인물로는 모차르트를 뽑았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모차르트는 괴테를 몰랐는데 실제로 둘은 만난적이 있긴하다. 모차르트가 7살쯤에 유럽연주회를 다닐 적에 프랑크푸르트에서 많은 관객 중의 한 사람으로 14살의 괴테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그는 어린 모차르트를 작은 칼을 차고 머리는 땋아내리고 있었다라고 당시 제자였던 [[요한 페터 에커만]]에게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그가 최고로 뽑았던 음악은 돈 조반니인듯 하다. 그 외에도 [[마술피리]]를 보고 감명받은 그는 마술피리 후속작을 만들기로 하지만 결국 미완성으로 단편으로 남아있다. * 직접 발견은 아니긴 하지만 [[카페인]]이 발견되는 것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독일의 과학자 [[http://en.wikipedia.org/wiki/Friedlieb_Ferdinand_Runge|프리들리프 페르디난트 룽게]]의 친우로, 1819년 당시 25살이던 룽게가 고양이의 동공에 근육 이완 효과가 있는 [[벨라돈나]]라는 식물[* 참고로 이 [[벨라돈나]]는 엄연히 독초에 속하는 부류이다. 이러한 마비성 독초의 독을 적당량 사용하여 의약품의 원료로 쓰는 경우가 현재에도 적지 않은데 이 실험 역시도 이와 일맥상통한다.]의 추출물[* 아트로핀. 알칼로이드 중 하나이다. 현대에도 안과에 가면 시력검사를 할 때 넣어줄 때가 있다.]을 떨어뜨린 후 동공이 확장되는 실험을 시연했는데, 이에 감명을 받은 괴테가 그에게 아라비안 [[모카]] 커피콩을 선물하면서 '여기에 들어있는 성분을 분석해서 왜 [[커피]]가 사람들을 깨우는 효과가 있는지를 알려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룽게는 이 성분을 단순히 커피의 유효성분이라는 뜻으로 카페바제(Kaffebase)라고 불렀으나, 1821년에 룽게와는 별도로 독자적으로 카페인을 발견한 프랑스의 피에르 장 로비케(Pierre Jean Robiquet), 피에르 조제프 펠르티에(Pierre Joseph Pelletier), 조제프 비어네메 카방투(Joseph Bienaimé Caventou)가 논문을 내고 caféine[* 프랑스어로 [[커피]]를 뜻하는 café에 접미사 -ine을 합쳤다. 지금도 프랑스에서는 [[카페인]]을 caféine이라고 표기한다.]이라는 명칭을 널리 정착시켜서 이쪽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다만, 후에 펠르티에는 룽게가 자기보다 먼저 한발 앞서 카페인을 발견했음을 인정하고 공표했다. * 이탈리아 여행 초기, 북부의 한마을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정탐병 내지는 스파이(...)로 몰려 곤란에 빠질 뻔한 적이 있다. 이유는 즉슨 딱 봐도 외부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여행객이 많지 않은 알프스 인근 마을에 침범해 강어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성의 폐허를 기웃거리며 그림을 그린다는 이유였는데, 괴테는 순전히 성채의 아름다움과 펼쳐진 자연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그 성을 둘러보며 스케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몰려온 사람들과 시장은 군의 이동 경로나 친입로를 계산하는 건 아닌가 의심하며 이를 믿지 않았고 괴테는 자신의 출생지가 프랑크푸르트임을 밝힌다.[* 위기에 몰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괴테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고 자신의 정확한 신분까지도 숨겼다. 이미 유명할 데로 유명해졌기에 조금이라도 더 자유롭게 이목을 끌지 않은 채 여행하기 위함이었다. 로마의 도달해서도 괴테는 신분을 숨기지만 본국에서 퍼진 소문과 독일의 작가 괴테가 이탈리아에 도달했다는 소문 그리고 상류층임이 분명하지만 신원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외부의 독일인이란 신분이 맞물려 결국 정체를 들키고 만다. 그러나 로마의 예술가들은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괴테를 모르는 척 형식을 지켜준다. 그렇지만 형식을 지킬뿐 괴테에게 자신의 저작을 보여주고 그에 대한 생각을 묻거나 낭독해 주길 바라는 작가들이 아주 많았다. 남부로 여행할 때가 되면 이미 괴테의 방문이 소문나 지방 귀족이나 군주가 그를 궁에 초대할 지경에 이른다.] 운이 좋게도 괴테가 어릴 적에 프랑크푸르트의 한 상점에 체류했던 남자가 나타나, 괴테가 묘사하는 프랑크푸르트와 남자가 알고 지낸 사람들의 행적 등을 이야기해주자, 괴테의 진실성을 입증해 주어 괴테는 마을을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게 된다. * [[도플갱어]]를 봤다는 기록을 남긴 바 있다. 환각인지 몰라도 괴테는 일기장에 홀로 말을 타고 사람이 없는 숲길을 가는데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 반대편에서 말을 타고 가는 걸 보고 놀랐다고 적었다. 그런데 8년뒤에 꿈에서 봤던 길을 걷다가 8년전 자신과 닮은 사람이 입던 재킷을 입고 가는 모습을 목격하고 '설마 8년전에 내가 본 것이 지금 이 모습인가' 하며 신기하다고 일기장에 적었다고 한다. 과거 국내 위인전이나 괴담집에서도 언급되다보니 괴테를 빙자한 카더라 괴담이 아니냐는 사람도 있을 법하지만, 이 이야기는 괴테의 일기장에서도 1808년 3월 8일에 이런 걸 보았다는 기록이 남아있기에 카더라 이야기가 아닌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독일에서도 괴테가 본 것을 안개벽에 반대편의 형상이 거울처럼 비쳐 보이는 브로켄 현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있다. 실제로 괴테는 안개 낀 아침에 산책하길 매우 즐겼기에 이 분석도 그럴 듯 하다. 일기장에 괴테는 이 이야기에 대해 아리송하다고만 썼을뿐, 깊게 파고들며 분석하거나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 [[초콜릿]] 광이었다. 집에서 기분이 좋을 때 먹는 초콜릿, 나갈 때 들고 다니는 초콜릿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청혼할 때도 초콜릿으로 했다고 다크 초콜릿 맛의 쾨스트리쳐 슈바르츠비어의 별명도 '''괴테 맥주.''' 대신 먹을 때마다 양치를 철저하게 했기에 죽을 때까지 이는 꽤 멀쩡했다고 한다. 괴테가 살던 시대에도 [[치약]]이 있었지만 그땐 꽤 비쌌다. 하지만, 꽤 부자 집안에서 태어난 괴테에겐 그리 문제 없었다. * 1912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독일 유명 작가이던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Gerhard Hauptmann,1862~1946)이 작가로 이름을 떨치던 시절, 무슨 생각을 하며 공원을 산책하다가 잔디밭으로 들어가 걷고 있었다. 그는 미처 그걸 깨닫지 못하고 계속 걸었는데 공원 관리인이 마구 화내면서 나오라고 소리쳤다. 하우프트만은 자신이 잘못은 했지만 그렇게 큰소리로 망신주는 것이 화가 나서 "내가 누군지 아시오!" 라고 맞받아쳤다. 그러자 관리인이 잠깐 말문이 막히다가 대꾸하길 "아, 당신이 그 유명한 괴테 씨라는 거 압니다만 그래도 지킬 건 지켜야 하지 않습니까?" 이 말에 하우프트만은 우울해져서 순순히 바깥으로 나와 집으로 돌아갔고 일기장에 "난 유명하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괴테라는 거인은 죽어도 100년이 되어가도록 내가 따르지 못한다." 라고 적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은근히 있긴 하다. 전설적인 테너 [[엔리코 카루소]]가 살아 생전, 자네 유명해졌다고 극찬하던 친구들에게 "아니..전혀."라고 시무룩하게 대꾸했는데...."얼마전에, 한 시골을 지나다가 시골 풍경이 너무 마음에 들고 사람도 안 보이고 해서 성악연습하고 있었지. 그런데, 지나가다가 이걸 듣고 나를 격찬하던 농부가 있었기에 반갑게 이야기하다가 그가 내 이름을 묻더군. 난 이름을 말했더니 그 농부는 엄청 기뻐하더군. 날 알아보는 사람이 이런 시골에도 있다니! 난 기뻐했는데 ......그 사람이 당신이 그 유명한 여행자 로빈슨 카루소군요!"([[로빈슨 크루소]]로 알았던 것.) 라고 말하는 통에 할 말을 잃었네.... 이런 실화도 있고 카루소가 미국 공연하다가 어느 여성이 시비를 걸어 이게 법적 분쟁이 벌어졌는데 미국 어느 언론은 엔리코 카루소를 여성 소프라노라고 오보 기사를 내서 카루소를 경악하게 하던 적도 있다.] * 독일문화원의 명칭에는 괴테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주한 독일문화원을 가면 간판의 독일어 표기가 '''Goethe Institut'''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홈페이지 도메인까지 [[http://www.goethe.de|www.'''goethe'''.de]]일 정도다. * 1955년 이후 매년 독일 문화원에서는 예술 부문에서 큰 기여를 한 비독일 국민에게 괴테의 이름을 딴 [[괴테 메달]]을 수여한다. * 괴테가 태어나고 많은 세월을 지낸 프랑크푸르트는 괴테가 자랑이다. 괴테가 태어난 집도 괴테 하우스라고 하여 그대로 남아있으며 괴테 박물관에 괴테의 흔적이 엄청나게 많이 남아있다. 그가 대학을 다닌 라이프치히도 마찬가지로 괴테 학습 박물관을 세우고 괴테를 많이 홍보한다. 위에 나오듯이 유학해 다니던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측도 학교 안에 그가 다니던 학교건물 앞에 괴테의 길이라는 이름을 지어붙이고, 동상까지 세웠으며 괴테 학습 박물관을 작게나마 세워 학교 성적표 및 당시 교수들의 평가서 등등을 전시하며 괴테가 우리 학교를 다녔다고 자랑하며 홍보한다. * 알려지지 않은 것이 괴테가 취미로 [[수석(암석)|수석]]을 무척 모으길 좋아했다는 점이다. 독일 전역 뿐 아니라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 해외에서도 마음에 드는 여러 암석을 가져왔고 지금도 그가 평생 모은 6,500여점이나 되는 수석이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괴테 하우스나 괴테 박물관 등등에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당연하지만 책도 많이 읽어서 그가 평생 모으고 읽던 책도 3,000여권이 그대로 전시되어 남아있다. * 대한민국에서는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의 저서 등의 영향으로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지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실제로는 잘못 퍼진 명언이다. 괴테 본인이 독일인이니 만큼 정말 괴테가 한 말이라면 독일어 원문도 함께 존재해야 하는데,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괴테가 했다고 실어둔 해외 사이트에서도 독일어 원문만은 발견되지 않는다. * [[포도주|와인]]을 사랑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맛없는 와인을 먹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와인을 사랑했다. 괴테가 직접 그린 그림을 레이블로 사용해 '괴테의 와인'이라 불리는 디히터트라움(Dichtertraum)도 있다. 독일어로 디히터(Dichter)는 시인, 트라움(Traum)은 꿈이라는 뜻이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괴테의 팬이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귀족들 사이에서 크나큰 인기를 들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전쟁터에서도 가지고 다니며 '''7번'''이나 읽었다. 나폴레옹이 작센 에르푸르트에 입성했을 당시 [[대륙 봉쇄령|영국을 봉쇄하는 제재]]를 꾀하고자 유럽의 여러 왕과 독일의 군주들을 불러모았는데, 그때 괴테는 아우구스트 공과 함께 에르푸르트를 방문한 상태였다. 나폴레옹은 방문자 명단에서 괴테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그를 초청해 환담을 나누었다. 이 시기에 괴테는 나폴레옹을 꽤나 긍정했는데 그것은 나폴레옹으로 인해 유럽의 세계가 확장되어 사람들의 시각이 좁은 세계의 머무르는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보다 넓은 세계로 나아간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것은 단지 괴테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당시 독일 땅의 많은 정치인과 시민들은 유럽을 전란에 몰아넣는 나폴레옹을 원수로 여겼지만 [[루트비히 판 베토벤|베토벤]]이 한때 그러했고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헤겔]]이 그런 것처럼 나폴레옹과 그가 일으킨 변화는 유럽 대륙의 지식인 층에서 새 시대의 정신이자 개막을 알리는 상징처럼 여겨졌었다.] * 아들인 아우구스트가 어릴적에 유럽에서 유행하던 [[단두대]] 장난감을 가지고 싶어하자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 구할 곳을 질문한 바 있다. 어머니에게 어린이에게 진짜 칼날이 달린 것을 위험하게 사준다는 게 아버지로서 할 일이 아니라는 꾸짖는 답장을 받고 사과편지를 보내야 했다. 실제로 단두대 장난감은 진짜 칼날로 만들어 아이들이 손가락을 넣고 장난치다가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가 여럿 벌어져 제조 및 판매가 금지되었었기 때문이다. * 일본의 소설가 겸 군의관 [[모리 오가이]]가 괴테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다. 독일 유학생 시절에 쓴 일기 중에 "괴테의 전집은 웅장하고 위대하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리고 오가이는 군의관으로서의 복무와 문학 작품 집필을 겸하는 데에서 내부적 고뇌와 외부적 굴욕을 통렬히 느끼기도 하였는데, 괴테는 황제로부터의 부름을 받아 바이마르의 고급 관리를 지내면서 작가 활동을 하여 오가이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음에서 동질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또한 오가이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일본에 최초로 소개하고 이에 대한 일본어 번역서도 내었고, 파우스트의 시구 중 다섯 구절을 본인의 작품에서 인용하기도 하였다. * 과거 [[동독]] 20마르크 지폐의 인물이었다. * 외국 작품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출판하는 일을 한 적도 있으며 비평문을 편집하고 출판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 생전에 권수로만 따지자면 100권을 가뿐히 넘을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저작을 남겼다. 그중에는 미완성 작품도 있고 일부만 남은 작품도 상당수 존재한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저작을 많이 남겼지만 전체 저작에 비하면 그 수가 많지 않게 느껴지기도 한다. 본 문서에도 그의 작품이 일부만 등재되어 있다.] * 괴테의 할아버지인 요한 볼프강 텍스토어는 훗날 손자인 괴테도 잠시 체류하게 되는 베츨러에서 법률 공부를 하다가 한 유부녀와 눈이 맞아 만남을 가졌는데 정사 도중 발각되어 가발도 내팽개치고 도망친 적이 있다고 한다. * 조선의 [[정약용]]과 거의 동시대인인데, 두 사람을 비교한 《괴테와 다산 통하다: 동서 지성사의 교차로》(2007)라는 책이 있다.[* 절판되었다.] * 로마에 체류할 당시 [[바티칸]]의 [[시스티나 경당]]에서 이루어지는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때 무려 성가를 들으면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을 감상했다고 한다. 그런데 너무 피곤한 상태였던 나머지 졸아버렸다고 한다. * [[쇼펜하우어]]가 무명의 청년 시절일 때부터 그와 교류했다. 괴테는 대중적인 작가로 활동하던 쇼펜하우의 어머니 '요한나 쇼펜하우어'의 살롱에 자주 방문했는데 쇼펜하우어와 만난 계기가 되었다. 괴테는 쇼펜하우어의 무시당하던 박사논문을 극찬했다. 괴테는 쇼펜하우어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차린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고 쇼펜하우어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그가 대단한 인물이 될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 1813년 가을쯤엔 괴테는 쇼펜하우어를 집에 초청하여 토론을 나누기도 했다. 색채 이론과 관련하여 서로 의견이 충돌하는 언짢은 시기가 있기도 했지만 늘 존중하는 태도로 서로를 대했다. 쇼펜하우어는 괴테의 열렬한 지지자 중 하나이기도 했고 그가 사망한 후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사업에 힘쓰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